작성일 : 09-05-18 0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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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齋)는 고대인도의 산스크리트어 ‘오포사타(Uposadha)’로서 재의 본뜻은 신업(身業), 구업(口業), 의업(意業)의 삼업(三業)을 정제(整齊)하여 악업을 짓지 않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점차 의미가 확대되어 부처님께 불공드리는 것과 스님에게 공양을 올리면서 행하는 불교의식을 뜻하게 되었으며 죽은 이를 천도(薦度)하는 법회도 재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재의식은 의식을 수행하는 목적과 시기, 기간 등에 따라 관음재, 지장재, 영산재, 시왕각배재, 사십구재, 생전예수재, 백일재, 소상재, 대상재, 우란분재, 수륙대재 등이 있는데 재의 의미가 원래 삼업(三業)를 정재하는 것과 모든 영혼을 천도(薦度)하고 산사람의 정신과 육체를 밝히는 일이므로 주로 천도재의 형태로 시행되고 있습니다.
1. 49재(四十九齋) 사람이 죽은 지 49일 되는 날에 지내는 재를 뜻합니다. 돌아가신 날로부터 7일마다 한번씩 7번 재를 올리는데 그 일곱 번째 재를 막재 또는 칠칠재, 49재라고 합니다. 이렇게 칠일에 한번 씩 재를 올리는 것은 영가가 7일주기마다 유명계(幽冥界)의 시왕(十王)들에게 심판을 받게 되므로 죽은 이후 매 7일마다 재를 지냄으로써 7·7일, 즉 49일째 되는 날 그 공덕으로 다음 생(生)에 좋은 곳을 갈 수 있게 하기위한 것입니다. 현재 무형문화재 제 50호로 지정된 영산재(靈山齋)도 상주권공재, 시왕각배재와 아울러 대표적인 49재, 즉 천도재이며 여타의 천도재보다 가장 규모가 크고 정교한 재의식입니다.
2. 우란분재(盂蘭盆齋) 인도의 산스크리트어 ‘울람바나(ullambana)’의 음역으로 지옥중생과 아귀도에 떨어진 중생을 위하여 여는 불사(佛事)를 말합니다. 목련 존자가 아귀도에 떨어진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여러 수행승에게 올린 공양에서 비롯합니다. 하안거(夏安居:여름 안거)의 끝 날인 음력 칠월 보름을 앞뒤로 한 사흘간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어 성대하게 올리는 불공으로, ‘지옥, 아귀, 축생’등 삼악도(三惡道)에서 괴로움을 겪고 있는 중생들을 위해 극락왕생과 부처님의 바른 법을 알게 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하는 행사인 것입니다.
우란분경(盂蘭盆經)에 의하면 석가모니부처님의 수제자였던 목건련(目蓮)존자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지옥에 떨어져 고통받고 있음을 알고 부처님께 구제방법을 묻자 부처님께서 스님들의 안거(安居:스님들의 수행기간)가 끝나는 날인 7월 15일에 지극한 정성으로 어머니의 제도를 기원하며 스님대중에게 갖가지 음식으로 공양을 베풀면 된다고 가르쳐 주었고 이를 그대로 행하자 어머니가 천상의 복락을 누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로 인도,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 이후로 성대하게 시행되어 왔으며, 조선조 이후 억불정책에 의해 국가적 차원의 행사는 폐지되었지만 민속명절인 백중(百衆)과 결합하면서 민중속에서 오늘날까지 꾸준히 전승되고 있습니다.
3. 예수재(預修齋) 스스로를 위한 참회와 공덕의 재로써 자신이 살아생전에 미리 수행과 공덕을 닦아두는 재의식을 말합니다. ‘역수(逆修)’라고도 하며, 여타의 재의식이 죽은 자를 구제하는 타력(他力)적인 천도재인 반면에 이는 살아 있는 이가 자신의 사후 복락을 위해 행하는 자력(自力)적인 신앙의례인 것입니다. 원래 예수재는 부처님께서 탄생하기 전 인도에서 무속신앙의 한 형태로 존재했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후일 <수원왕생시방정토경>이라 하였는데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면서 여기에 도교 의식이 보태져 '예수시왕생칠칠재의식'을 하게 되었고, 이것이 크게 유행하면서 오늘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 이후로 시행되어 왔는데 의식의 주요대상으로는 불보살님을 비롯해서 명부시왕(冥府十王) 또는 그 권속을 청하여 공양을 올리고, 전생에서 진 빚을 갚아 그 공덕으로 내생에서의 복을 기원하는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4. 수륙재(水陸齋)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를 달래며 위로하기 위하여 불법(佛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불교의식으로 수륙무차평등재의(水陸無遮平等齋儀), 국행수륙대재(國行水陸大齋), 수륙회(水陸會), 비제회(悲濟會)라고도 합니다. 수륙재의 시원은 불심(佛心)이 두터운 중국 양(梁)나라의 무제(武帝)가 유주무주(有住無住)의 고혼(孤魂)들을 널리 구제함이 제일가는 공덕이라 생각하고 스스로 의식문(儀式文)을 만들어 그 의식문에 따라 서기 505년에 금산사(金山寺)에서 재를 베푼 것이 그 시초라고 되어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 971년(광종 22) 수원 갈양사에서 처음 시행하였으며 1093년(선종 10)에는 최사겸(崔士謙)이 송(宋)에 가서 수륙의문(水陸儀文)을 구해온 기록이 있고 1348년(충목왕 4)에는 왕이 병이 나자 덕녕공주가 천마산에 수륙재를 개설하고 기도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억불정책의 일환으로 수륙재의 형식을 규제하기도 했으나 폐지하지는 않았습니다. 태종의 상(喪)을 올릴 때부터 규모가 한정되었지만, 세종이 위독할 때 구병(求病)을 위한 수륙재가 올려진 것으로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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