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말씀

작성일 : 25-08-24 15:05
구원받는 길(2) - 성철 스님
 글쓴이 : 도심혜천
조회 : 1,227  
구원 받는 길 (2)

성철 스님

누가 “어떤 것이 불교입니까?” 하고 물으면 이렇게 답합니다.

“세상과 거꾸로 사는 것이 불교다.”

세상은 전부 내가 중심이 되어서 나를 위해 남을 해치려고 하는 것이지만 불교는 “나”라는 것을 완전히 내버리고 남을 위해서만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과는 거꾸로 사는 것이 불교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장에는 남을 위하다가 내가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지만, 설사 남을 위하다가 배가 고파 죽는다고 해도 남을 위해서 노력한 그것이 근본이 되어서 내 마음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밝아지는 동시에 무슨 큰 이득이 오느냐 하면 내가 본래 부처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 부처라는 것을!

자기는 굶어 죽더라도 남을 도와주라고 하면 “스님도 참 답답하시네. 자신부터 한번 굶어 보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70평생을 산다고 해도, 100살을 산다고 해도 잠깐 동안입니다.

설사 100살을 살면서 지구 땅 덩어리의 온 재산을 전부 내 살림살이로 만든다고 해 봅시다.

부처님은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해서 또 무량아승지겁이 다하도록 온 시방법계를 내 집으로 삼고 내 살림살이로 삼았는데 그 많은 살림살이를 어떻게 계산하겠습니까?

인생 100년 생활이라는 것이 아무리 부귀영화를 하고 잘 산다고 해도, 미래겁이 다하도록 시방법계, 시방불토에서 무애자재한 그런 대생활을 한 그것에 비교한다면 이것은 티끌 하나도 안 됩니다.

조그마한 먼지 하나도 안 됩니다.

내용을 보면 10원짜리도 안 됩니다.

그러나 10원짜리도 안 되는 이 인생을 완전히 포기해서 남을 위해서만 살고 어떻게든 남을 위해서만 노력합니다.

그러면 저 무량아승지겁, 억천만겁 전부터 성불해 있는 그 나라에 돌아가고 그 나를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10원짜리 나를 희생하여 여러 억천만원이 넘는 참나를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괜찮은 장사가 아닙니까.

장사를 하려면 큼직한 장사를 해야 합니다. 내가 중심이 되어 사는 것은 공연히 10원 20원 가지고 죽니 사니 칼부림을 하는 그런 식 아닙니까?

아주 먼 옛날 부처님께서는 배고픈 호랑이에게 몸을 잡아먹히셨습니다. 몸뚱이까지 잡아먹히셨으니 말할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배고픈 호랑이를 위한 것도 있었지만 그 내용에는 큰 욕심, 큰 욕심이 있는 것입니다.

물거품 같은 몸뚱이 하나를 턱 버리면 그와 동시에 시방법계 큰 불국토에서 미래겁이 다하도록 자유자재한 대해 탈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것도 그런 것입니다.

나중에 크면 임금이 될 것이지만 이것도 가져봐야 별 것 아닙니다.

서푼어치의 값도 안 되는 줄 알고 왕위도 헌신짝같이 차버리고 큰 돈벌이를 한 것 아닙니까?

근래에 와서 순치황제 같은 분은 만주에 나와서 1년 동안 전쟁을 하여 대청제국을 건설한 분입니다.

이것은 중국 역사상 가장 큰 나라입니다.

중국 본토 이외에도 남북만주, 내외몽고, 티벳, 인도지나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것입니다.

그래 놓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참으로 눈을 떠서 미래겁이 다하도록 해탈도를 성취하는 것에 비하면, 이것은 아이들 장난도 아니고 10원짜리 가치도 안 되는 것임을 알고 대청제국을 헌신짝처럼 팽개쳐 버리고 그만 도망을 가 버렸습니다.

금산사라는 절에 가서 다른 것도 아니고 나무하고 아궁이에 불이나 때는 부목이 되었습니다.

대청제국을 건설한 만고의 대영웅 순치황제 같은 사람이 절에 가서 공부하기 위해 나무해 주고 스님네 방에 불이나 때 주고,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공부를 성취 안할

래야 안 할 수 없습니다.

순치황제가 출가할 때, “나는 본시 서방의 걸식하며 수도하는 수도승이었는데, 어찌하여 만승천자로 타락하였는고? (我本西方納子 緣何流落帝王家)” 하고 탄식하였습니다. 만승천자의 부귀영화를 가장 큰 타락으로 보고 만승천자의 보위를 헌신짝같이 차 버린 것입니다.

이것도 생각해 보면 욕심이 커서 그렇습니다.

대청제국이란 그것은 10원짜리도 못되고, 참으로 눈을 바로 뜨고 보면 시방법계에서 자유자재하게 생활할 터인데 이보다 더 큰 재산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나간 이야기를 한 가지 하겠습니다.

6·25사변 때 서울대학교에서 교수하던 문 박사라고 하는 이가 나를 찾아와서 하는 말입니다.

“스님네는 어째서 개인주의만 합니까? 부모형제 다 버리고 사회와 국가도 다 버리고 산중에서 참선한다고 가만히 앉아 있으니 혼자만 좋으려고 하는 그것이 개인주의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런데 내가 볼 때는 스님네가 개인주의 아니고 당신이 바로 개인주의야!”

“어째서 그렇습니까? 저는 사회에 살면서 부모형제를 돌보고 있는데, 어째서 제가 개인주의입니까?”

“한 가지 물어 보겠는데, 당신 여태 50평생을 살아오면서 내 부모 내 처자 이외에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는지 양심대로 말해 보시오.”

“참으로 순수하게 남을 위해 일해 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스님네가 부모형제 버리고 떠난 것은 작은 가족을 버리고 큰 가족을 위해 살기 위한 것이야. 내 부모 내 형제 이것은 작은 가족이야. 이것을 버리고 떠나는 그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보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내 손발을 묶는 처자권속이라고 하는 쇠사슬을 끊어버리고 오직 큰 가족인 일체 중생을 위해서 사는 것이 불교의 근본이야! 내 부모 내 처자 이외에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당신이야말로 철두철미한 개인주의가 아닌가?”

“스님 해석이 퍽 보편적이십니다.”

“아니야, 이것은 내가 만들어 낸 말이 아니고 해인사의 팔만 대장경판에 모두 그렇게 쓰여 있어. ‘남을 위해서 살아라’하고. 보살의 육도만행 육바라밀의 처음이 무엇인고 하니 베푸는 것이야.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남을 도우는 것, 그것이 바로 보시(布施)야! 팔만대장경 전체가 남을 위해서 살아라 하는 것이야.”

“…….”

“그러니 승려가 출가하는 것은 나 혼자 편안하게 좋으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고 더 크고 소중한 것을 위해 작은 것을 버릴 뿐이야. 그래서 결국에는 무소유(無所有)가 되어 마음의 눈을 뜨고 일체 중생을 품 안에 안을 수 있게 되는 것이야. 우리가 마음의 눈을 뜨려면 반드시 탐내는 마음, 이것을 버려야 하는데, 탐욕을 버리려면 `나만을 위해서, 나만을 위해서' 하는 이 생각을 먼저 버려야 하지.”

전에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불공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 앞에 갖다 놓고 절하고 복 비는 것이 불공이 아니고 순수한 마음으로 남을 도우는 것이 불공이라고.

부처님께서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에 아주 간곡하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당신 앞에 갖다 놓는 것보다도 중생을 잠깐 동안이라도 도와줄 것 같으면 그것이 자기 앞에 갖다 놓는 것보다도 여러 억 천만 배 비교할 수 없는 공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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