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5-30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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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탈문 여는 열쇠는 연기(1)
고우 스님
선(禪)을 놓고 저는 말을 하려하고 여러분들은 들으려 합니다.
말하는 사람이 있고 듣는 사람이 있다는 전제하에 선을 말한다면 이미 그르친 것입니다.
그것은 ‘말’(馬)을 보고 ‘사슴’(鹿)이라고 하는 것처럼 입을 떼는 순간 저는 여러분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선에는 주관과 객관이 따로 없고, 우리는 모두 본래 완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자리는 말로는 해석할 수도, 전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는 부처라 해도, 중생이라 해도, 번뇌라 해도, 지혜라 해도, 구속되어 있다 해도, 해탈해 있다 해도 모두 다 거짓말입니다.
그러나 묵묵히 있다고만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조금이라도 선에 접근할 수 있도록 언어를 빌려 방편으로 말을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깨달은 분이라 하는데 여기서 궁금증이 하나 생깁니다.
깨달은 분과 우리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부처님 가르침을 기준으로 볼 때 우리는 그 가르침의 효능을 제대로 발휘 하지 못하기 때문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바로 그 차이를 알면 불교의 궁극적인 핵심과 좀 점에 제가 말씀드렸던 ‘본래 완성’ ‘본래 성불’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과 우리가 다른 것 중 하나가 우리는 형상만 쳐다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형상에만 머물고 있는 우리는 좋다 나쁘다, 이것은 우수하다 열등하다, 귀하다 천하다며 분별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분별은 귀와 눈, 입 등을 통해서 시작되고 그로인해 자신을 학대하고 있습니다.
자기만 학대하면 그래도 괜찮은데 주변에 있는 가까운 사람도 함께 학대를 하니 더 큰 문제입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볼까요? 앞집은 그랜저인데 우리는 왜 티코냐? 옆집 애는 서울대 다니는데 너는 왜 이 모양이냐? 이것은 자기와 주변 사람까지 학대하는 겁니다.
개인뿐 아니라 사회도 그런 식으로 우열을 따지고 취사선택하면서 국가는 국가대로, 사회는 사회대로, 세계는 세계대로 주변 사람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역사입니다.
그러니 지구상에 전쟁이 끊이질 않습니다.
그래서 육조 스님은 ‘남의 허물을 보지 말고 자신의 허물을 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허물을 보면 밖에서 학대하는 동기유발을 일으키더라도 절대로 자신을 학대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남이 나를 화나게 만들더라도 내가 화내는 것은 결국 내 몫이니, 남이 나를 화나게 하는 그 허물을 보지 말고 ‘화를 내는 자기 허물을 보라’는 것입니다.
[출처] 고우 스님 - 해탈문 여는 열쇠는 연기(1) (부처님 찾아 떠나는 여행) | 작성자 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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