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1-06-09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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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와 망상(3)
우룡 스님
'모두가 부처님이 하는 일!'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하고 삽니다.
오히려 '나는 언제나 깜깜한 중생이니까 이런 실수 저런 죄를 짓고 살지만 스님들이라면 나와는 다른 세상에 살고 계실 것이다라는 착각을 합니다.
스님의 삶이나 중생의 삶이나 모두가 법계의 일입니다.
이렇게 갈라놓고 저렇게 따지는 것은 망상입니다.
모두가 하나로 똘똘 뭉쳐 있는데 부처가 어디에 따로 있고 중생이 어디에 따로 있으며, 망상과 지혜가 어찌 따로 있는 것이겠습니까?
조각을 내니까 탈이 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누가 옆에서 분별심을 채찍질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자꾸만 분별심을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좋은 것, 나쁜 것 가려내어 조각을 나누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조각을 내고 나누는 일이 버릇이 되어버린 우리는 좋은 일, 나쁜 일, 잘한 일, 잘못한 일 등으로 자꾸 조각을 내어 탈을 만들고 있습니다. 원각경에서는 원각의 자성자리가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모양도 없는 자리인데 중생의 차별심으로 인해 보살성(菩薩性)이 생기고, 성문성(聲聞性)이 생기고, 연각성(緣覺性)이 생기고, 부정성(不定性), 외도성(外道性)이 생긴다고 하였습니다.
진리 자체는 특정한 성품이 있는 것이 아닌데 개성을 따라서 진리가 그대로 나타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진리는 고정된 어떤 모습이 없습니다.
그리고 고정된 모습이 없기 때문에 자성을 고집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인연을 따라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작은 모래 알갱이에게 가서는 모래라는 인연을 따랐고, 큰 바위에게 가서는 바위라는 인연을 따랐을 뿐입니다.
도토리나무는 도토리나무대로 진리가 있고,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진리가 있습니다.
대우주법계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생명력이 어떤 인연에 의지해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난 것뿐입니다.
원각(圓覺), 진리 그 자체는 본래 평등하여 차별성이 없는데 모든 성품을 따라서 일어나기 때문에 낱낱의 개성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비유를 하건대 바다라고 하면 거기에는 큰 파도건 작은 파도건 물결이건 물거품이건 다 포함이 됩니다.
곧 바다가 움직일 때에 파도가 일어나고 거품도 일어나는 것과 같이 진리 그 자체는 차별성이 없지만 개성을 따라서 파도가 일어나고 거품이 있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바다는 대우주의 본성의 자리이고 파도는 개성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개성을 따라 개성에 맞추어서 움직이기 때문에 차별성이 있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진리 자체는 하나일 뿐인데 이 진리라고 하는 것이 묘하게도 개성을 따라 나타나기 때문에 개성이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지만 실제로 개성은 없습니다.
실제로 '보살이다, 중생이다, 성문이다, 연각이다'라는 개개의 성품은 없다는 것입니다.
진리에는 '보살이다, 중생이다, 깨달았다, 미했다'가 없습니다.
우리가 공부를 쉬임 없이 지어가면 눈앞의 헛것이 없어지게 됩니다.
결국 대우주 진리의 자성은 그대로인데 여기에 자꾸 차별을 내는 것이 망상이 됩니다.
진리가 언제 '내가 진리이니까 너희들은 이제 나를 진리라고 불러라'는 소리를 한 적이 있습니까?
내 생각 내 마음이 우상을 만들어 부처, 불교를 멋대로 생각하고 멋대로 판단을 하게 되면 여기에 병통이 붙어버립니다.
이제 한 번 돌아보십시오.
나의 이야기가 어렵습니까?
내 쪽에서 부지런히 연구하고 공부를 하면 불교의 이치는 전부 이해가 되는 쉬운 이야기가 되지만 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쉽게 풀이를 해주어도 어려운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망상이 바로 지혜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 흐르듯이 끊임없이 공부를 하면 망상이 지혜로 바뀐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망상과 지혜는 진리 그 자체에서 보면 차별성이 없는 본래 평등이기 때문입니다.
[출처] 우룡 스님 - 지혜와 망상(3) (부처님 찾아 떠나는 여행) | 작성자 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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